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휴이 롱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[[파일:huey_child_lg.jpg]] 어릴 적의 휴이 롱과 남매들. 맨 왼쪽이 휴이이며, 맨 오른쪽은 동생인 [[얼 롱]]이다. 풀네임은 휴이 피어스 롱 쥬니어로 [[1893년]] 미국 [[루이지애나]]주 윈필드에서 태어났다. 출신지는 비교적 빈곤한 지역이었으나 그는 비교적 부농 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는 [[홈스쿨링]]을 받다가 고등학교에서는 비상한 두뇌로 월반을 할 정도의 재능을 보여줬다, 그러나 그는 교내 비밀결사에 가입한 후 이 머리를 일찌감치 학업보다는 대중을 선동하는데 써먹기 시작했고, 결국 교사들과 대립하다 퇴학까지 당했다.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족의 권유로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나와 [[세일즈맨]]을 하면서 돈을 모은 뒤 오클라호마 뱁티스트 대학 법학과에 들어가 법학을 전공했다. [[변호사]]가 된 후 정치에 관심을 두고 스탠다드 오일을 포함한 대기업들을 공격해 정치적으로 주목을 받았다. 그 인기를 바탕으로 [[1924년]] [[루이지애나]] [[주지사]] 선거에 출마했지만 경험 부족으로 낙선한뒤 4년 동안 열심히 표밭을 일구어서 [[1928년]] 선거에서는 서른 여섯의 나이로 당당히 최연소 주지사로 당선되었다. 롱은 농산물 가격 폭락으로 어려움에 빠진 [[목화]] 농가를 구제하기 위해 '목화 휴일'이란 이름으로 전국에서 처음으로 농산물 생산량을 조절했다. 또한 적극적인 [[실업자]] 구제를 위해 [[고속도로]], [[아스팔트]] 포장도로, 신규 교량 건설을 시행했다. 하지만 주의 적자가 10배나 불어났는데 이는 건설사업 과정에서 각종 [[뇌물]]수수 및 리베이트 등의 비용들까지 추가된 탓이었다. 자칫 주지사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지만 롱은 주의회 의원들을 돈으로 구워삶아서 주의회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. 롱의 입김은 주지사가 관여하기 어려운 주 [[사법부]]나 교육기관에까지 미쳐서 루이지애나를 쥐고 흔들게 되었다. [[1929년]], 재정적자를 타개할 요량으로 [[석유]]회사 스탠다드 오일에 중과세를 부과하려 했다. 주 하원이 이에 반발해서 롱에 대한 [[탄핵]] 소추안을 발의했지만 롱은 매수와 협박으로 이를 부결시키는데 성공했다.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중앙 정계로 진출한 롱은 [[1932년]], 자신의 수하인 오스카 K. 알렌을 루이지애나 주지사로 당선시키고 자신은 뒤에서 루이지애나를 계속 쥐고 흔들었다. 당초 롱은 32년 대선에서 [[프랭클린 D. 루스벨트]]를 지지했지만 롱의 급진적인 정책을 내심 못마땅해한 루스벨트가 롱과 거리를 두려고 하자 루스벨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[[1936년]] 대선에는 본인이 직접 출마하려고 구상했다. 전국적으로 750만명 이상이 그를 지지하는 모임에 가입하고, 매주 6만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루스벨트 대통령보다도 많은 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